하타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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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 내각은 1994년 4월 28일부터 6월 30일까지 64일 동안 재임했다. 호소카와 내각의 총사퇴 이후, 자유민주당과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연립 7당과 추가 3당의 지지를 받아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총리로 지명되어 출범했다. 그러나 사회당의 이탈로 소수 여당 내각이 되었고, 법무대신의 난징 대학살 관련 발언으로 혼란을 겪었다. 내각은 예산 성립 후 불신임 결의안 제출 전에 총사퇴했으며, 일본 내각 역사상 세 번째로 짧은 기간의 내각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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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타 쓰토무 - 신생당
신생당은 1993년 하타 쓰토무를 중심으로 자유민주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창당한 일본의 정당이며, 중의원 선거에서 55석을 얻어 호소카와 내각과 하타 내각에 참여했으나, 일본사회당의 연립 이탈과 무라야마 내각 출범 이후 야당으로 전락하여 1994년 신진당에 합류하며 해산되었다. - 하타 쓰토무 -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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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 내각 | |
---|---|
하타 내각 | |
![]() | |
기본 정보 | |
내각 명칭 | 하타 내각 |
대수 | 80 |
수상 이름 | 하타 쓰토무 |
수상 전직 | 부총리 겸 외무대신, 중의원 의원 및 신생당 당수 |
성립 연도 | 1994년 |
성립 월일 | 4월 28일 |
종료 연도 | 1994년 |
종료 월일 | 6월 30일 |
관할 국가 | 일본 |
정부 수반 | 하타 쓰토무 |
국가 원수 | 아키히토 천황 |
사진 설명 | 총리 관저에서 촬영된 하타 쓰토무(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 총리와 내각 구성원 (1994년 4월 28일) |
정치 | |
정치 체제 | JRP–공명당–JNP–DSP-자유개혁연합 연립 |
연립 여당 |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자유당, 개혁의 회, 민주개혁연합민주개혁연합은 참의원에서 일본신당·신생당과 함께 통일 회파 "일본·신생·민주개혁연합"을 구성했다.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신당 사키가케, 신당 미라이, 사회민주연합 (각외 협력) 일본사회당 (수반 지명 직후 연립 이탈) |
의회 상태 | 연립 소수당 |
반대 정당 | 자유민주당 |
반대 지도자 | 고노 요헤이 |
역사 | |
이전 내각 | 호소카와 내각 |
이후 내각 | 무라야마 내각 |
설립일 | 1994년 4월 28일 |
해산일 | 1994년 6월 30일 |
기타 | |
각료 명단 | 각료 명단 |
2. 재직 기간
1994年|1994년일본어(헤이세이 6년) 4월 28일 ~ 1994年|1994년일본어(헤이세이 6년) 6월 30일
- 재직 일수: 64일
3. 정치적 배경 및 발족 과정
1994년 4월 25일, 호소카와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자유민주당과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연립 7당과 1개 회파(일본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및 자유민주당 탈당 의원들로 결성된 3개 당(자유당, 개혁의 회, 신당 미래)이 신생당 당수 하타 쓰토무를 국회에서 후임 총리로 지명하여 내각을 발족했다.
그러나 내각 구성 논의 중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 민사당 서기장 요네자와 다카시를 중심으로 하는 ‘원·원 라이스’가 주도하는 정권 운영에 반발한 신당 사키가케와 창당 후 '제3정당' 노선을 표방한 신당 미래는 내각에 참여하지 않고 각외 협력 의사를 밝혔다.
총리 지명 직후, 일본사회당의 영향력 약화를 목표로 신생당, 일본신당, 민사당, 자유당, 개혁의 회 등 5개 당이 별도로 결집하여 중의원 회파 '개신' 결성을 발표했다. 이에 사회당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다음 날인 26일에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에서 이탈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하타 내각은 소수 여당 내각이 되었다.[1]
3. 1. 내각 구성의 혼란
1994년 4월 25일, 호소카와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자유민주당·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연립 7당과 1개 회파(일본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 및 자유민주당 탈당 의원들로 결성된 3개 당(자유당, 개혁의 회, 신당 미래)이 신생당 당수 하타 쓰토무를 국회에서 후임 총리로 지명하여 내각을 발족했다. 그러나 내각 구성 논의 중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 민사당 서기장 요네자와 다카시를 중심으로 하는 ‘원·원 라이스’가 주도하는 정권 운영에 반발한 신당 사키가케와 창당 후 '제3정당' 노선을 표방한 신당 미래는 내각에 참여하지 않고 각외 협력 의사를 밝혔다.총리 지명 직후, 일본사회당의 영향력 약화를 목표로 신생당, 일본신당, 민사당, 자유당, 개혁의 회 등 5개 당이 별도로 결집하여 중의원 회파 '개신' 결성을 발표했다. 이에 사회당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다음 날인 26일에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에서 이탈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하타 내각은 소수 여당 내각이 되었다.
발족 초기 계속된 혼란으로 내각 조각이 지연되어 총리의 친임식(4월 28일 오전 8시 55분)과 각료 인증식(같은 날 오후 6시 15분)이 일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9시간 남짓한 사이에 총리가 모든 각료의 임시 대리와 대신청 등의 위원장·장관 사무 취급을 모두 겸임해야 했다(1인 내각).[14] 그러나 내각 구성 직후 법무대신 나가노 시게토가 취임 직후 “난징 대학살은 날조됐다”라고 발언했다가 취임 11일 만에 사임(사실상 경질)하면서 혼란이 계속되었다.[9]
3. 2. 1인 내각
1994년 4월 25일, 호소카와 내각이 총사퇴한 후, 자유민주당과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연립 여당들이 신생당 당수 하타 쓰토무를 후임 총리로 지명하여 내각이 발족되었다.[8] 그러나 내각 구성 논의 과정에서 일본사회당이 연립에서 이탈하여 하타 내각은 소수 여당 내각이 되었다.내각 조각 지연이 예상되어 총리의 친임식과 각료 인증식이 일괄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9시간 남짓한 사이, 총리가 모든 각료의 임시 대리와 대신청 등의 위원장·장관 사무 취급을 모두 겸임해야 했다. 이를 '1인 내각'이라고 부른다.[8]
1994년 4월 28일 임명된 1인 내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8]
직책 | 대수 | 성명 | 출신 등 | 특명사항 등 | 비고 | |
---|---|---|---|---|---|---|
내각총리대신 | 80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신생당 당수 직무 대행 | ||
법무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외무대신 | 116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대장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문부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국립국회도서관연락조정위원회 위원 | 신생당 당수 | |
후생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농림수산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통상산업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운수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신도쿄 국제공항 담당 | 신생당 당수 | |
우정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노동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건설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자치대신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임시 대리 (내각총리대신 겸임) 정치개혁 담당 | 신생당 당수 | |
내각관방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여성 문제 담당 | 신생당 당수 | |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총무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홋카이도개발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방위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경제기획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종합교통 대책 담당 | 신생당 당수 | |
과학기술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 신생당 당수 | |
환경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지구환경문제 담당 | 신생당 당수 | |
오키나와개발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 신생당 당수 | |
국토청장관 | - | 하타 쓰토무 | 중의원 신생당 | 사무 취급 (내각총리대신 겸임) 연구·학원도시 담당 | 신생당 당수 | |
3. 3. 나가노 시게토 법무대신 경질
호소카와 내각이 1994년 4월 25일에 총사퇴한 후, 법무대신 나가노 시게토는 취임 직후 “난징 대학살은 날조됐다”라고 발언하여 취임 11일 만에 사임(사실상 경질)되었다.[4]
4. 국회 총리 지명 선거
1994년 4월 25일, 제129회 국회에서 총리 지명 선거가 실시되었다.[10]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 모두에서 과반수 득표가 필요했다. 양원 모두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과반수를 넘어 총리로 지명되었다.[12]
4. 1. 중의원
1994년 4월 25일, 제129회 국회에서 중의원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가 실시되었다.[10] 총 투표수 511표 중 과반수인 256표를 득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후보 | 소속 정당 | 득표수 |
---|---|---|
하타 쓰토무 | 신생당 | 274표 |
고노 요헤이 | 자유민주당 | 207표 |
후와 데쓰조 | 일본공산당 | 15표 |
무효 | 6표[11] | |
기권 (의장 및 부의장 포함) | 9표 |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가 274표를 얻어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 자유민주당의 고노 요헤이는 207표, 일본공산당의 후와 데쓰조는 15표를 얻었다. 무효표는 6표, 기권은 의장 및 부의장을 포함하여 9표였다.
4. 2. 참의원
후보 | 정당 | 득표수 |
---|---|---|
하타 쓰토무 | 신생당 | 127 |
고노 요헤이 | 자유민주당 | 95 |
후와 데쓰조 | 일본공산당 | 11 |
무라야마 도미이치 | 일본사회당 | 1 |
기타 및 기권 | 18 | |
출처: [http://www2n.biglobe.ne.jp/~rei/next42e.htm Political Data: Japanese Politics 1994][13] |
1994년(헤이세이 6년) 4월 25일에 실시된 참의원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타 쓰토무 (신생당) 127표, 고노 요헤이 (자유민주당) 95표, 후와 데쓰조 (일본공산당) 11표,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사회당) 1표, 그리고 기권 13표였다.
5. 내각의 성과 및 정책
하타 내각은 새해 예산 성립과 규제 개혁을 통해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자 공공요금의 연내 인상을 동결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웠다.[20][16]
6. 퇴진
1994년 예산 성립 후 자유민주당이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자유민주당과 일본사회당의 찬성 다수로 가결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타 내각은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총사퇴했다. 이 때문에 하타 내각은 ‘예산 관리 내각’이라고 불렸다.[17] 하타는 한때 중의원 해산까지 생각했다고 말했지만, 당시에는 아직 소선거구제에 근거한 새로운 중의원 선거구 획정이 완성되지 않았고, 그대로 해산을 하게 되면 종래의 중선거구제로 총선거가 진행되기 때문에 도저히 과반수를 넘을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결국 중의원 해산은 포기하고 내각 총사퇴를 선택했다.[17]
결국 하타 내각은 64일(63일[3]) 만에 와해됐고,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54일)과 제3차 가쓰라 내각(62일)에 이어 일본 내각 역사상 세 번째 최단명 내각이 되었다. 또한 현행 일본국 헌법 하에서는 최단 기록이다.[1] 하타는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사임 이후 총리가 되었으나, 일본사회당은 하타의 후보 지명을 지지했지만 보수적인 신진당과의 국방 정책 차이로 연정에서 이탈하여 하타 내각은 중의원에서 소수 정부가 되었다.[1] 이는 6월 정부 붕괴로 이어졌고, 사회당은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했으며, 하타는 신임 투표에 직면하여 새 선거를 치르는 것보다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임했다.[2]
7. 국무대신
신생당 당수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5월 8일[22]
민사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자유당 당수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국립국회도서관 연락조정위원회 위원)
신생당 당수
~ 1994년 6월 30일
(연금 문제 담당)
신생당 당수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신도쿄 국제공항 문제 담당)
신생당 당수
공명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공명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개혁의 회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공명당
~ 1994년 6월 30일
(정치 개혁 담당)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공명당 위원장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민사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일본신당
~ 1994년 6월 30일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
신생당 당수
공명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공명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
신생당 당수
신생당
~ 1994년 6월 30일